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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3도나 되는 무더운 날씨 때문에 길가에는 인적 하나 없었다. 좀 더 위에 깊숙이 자리한 중앙도서관의 석조 외벽에는 빼곡한 창문들에 은은한 채광이 오가고 있었다. 도서관의 1층 로비 한가운데에는 물줄기 하나 묻어있지 않은 분수대가 있고, 그 안엔 50년 전 과거가 그대로 박제된 것 같은 조각들이 침울하게 서있었다. 웅성거리는 발걸음이 저만치 미적지근한 대기 속에서 올라왔다. 화요일의 한가로움과 여름날의 서글픔 탓으로 모든 것이 나른해 보였다.
주인공은 자료실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20m 높이의 육중한 대리석 기둥 16개로 둘러싼 원형 자료실의 높은 창문에서 산란되는 빛들 때문에 어쩐지 침침한 눈을 꿈벅거리며 서가 사이를 걷고 있다. 이마의 땀을 닦기 위해 300번대 서가 앞에 잠시 멈췄다. 줄곧 반쯤 감겨 있는 눈이 서가의 흰 책등의 책을 찾기에 여지없이 바빴다. 지루하고 버내큘러한 사회과학 도서들의 긴 면을 훑은 다음 실망스런 걸음으로 다른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자 문학 서가가 앞에 있었다. 확실히 자료실은 바깥보다 서늘했다. 길고 둥근 복도에 서는 사서가 임시 배열대를 덜거덕거리며 끌고 있는 소리가 뒤로 작아지고, 느긋하게 넘어가는 페이지의 소리들이 앞으로 커졌다. 주변 소음에 뾰족해진 귀를 세운 주인공은 이들의 소리가 제법 수직적인 질서의 화성이라 생각하곤 자료실의 리듬을 깰 만한 선율을 만들고 싶었다. 주인공의 키보다 5-60cm 높은 위치에 꽂힌, 앙상하게 헤져버린 문학도서들을 바라보며 조금 전의 생각들은 금세 흩어졌다. 주인공은 위, 아래, 좌, 우로 시선을 옮기며 책 제목을 살펴읽고, 책등의 색상을 관찰했다. 훑어보기와 훑어읽기 그것만으로도 토목국, 담배공사, 상업, 연극, 선원, 모든 인간과 이야기들에 대해 마치 알게 되는 것 같은 순수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주인공은 수십번도 더 일어났다가 도로 몸을 숙였고, 000번 서가부터 900번대 서가까지 어떤 마력에 사로잡힌 듯 분주히 걸으며 불쑥 흰 표지의 책들을 꺼내 안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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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바르와 페퀴셰Bouvard et Pécuchet
<부바르와 페퀴셰>는 파리에서 필경사로 일하는 두 남자 부바르와 페퀴셰의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된다. 두 사람은 같은 직업과 40대 후반의 독신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외모나 성격에서 다른 점이 더 많지만, 마치 부부처럼 잘 어울리는 한 쌍을 이룬다. 부바르가 어느 날 갑자기 뜻밖의 유산을 상속받자 두 사람은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정착한다. 일견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그들이 전원생 활을 시작하여 학문의 세계에 입문하면서 소설은 수많은 책들과 함께 전개되는 다소 특이한 형식을 갖추게 된다.
플로베르는 이 소설에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백과사전’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누가 어리석다는 것일까? 학문의 세계에 뛰어들었으 나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적용하지 못하는 부바르와 페퀴셰일까? 그러나 두 사람은 어리석지 않다. 이미 소설의 1장에서 새로 운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날로 그들의 ‘지성이 높아갔다’고 서술되어 있다. 첫 번째 연구 대상인 농업에서부터 두 사람은 서로 다르게 기술된 전문 서적들 사이에서 고민하고, 나름대로 적용하고, 문제를 제기한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그들은 책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비판 하고 자기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연구도 농업, 원예 같은 실용 분야에서 철학과 종교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거의 모든 학문을 망라하고 있 다. 연구 대상을 바꿀 때는 사소하지만 늘 어떤 계기가 있고, 비록 실패로 끝나긴 해도 어떤 분야든 항상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연구한다. 이런 두 인물을 어리석다고 보기는 어렵다.
플로베르는 ‘현대의 모든 사상을 검토해 볼 작정’에서 <부바르와 페퀴셰>를 쓰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소설을 위해 1500권 이
상의 책을 읽었던 작가처럼 두 인물도 다양한 분야에서 상당한 독서를 한다. 그런데 두 사람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서로 다른 이론과 마주치고, 그로 인해 고민을 해도 작가는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작가가 어떤 판단이나 결론을 내리지 않는 객관적 입장을 시종
일관 견지하며 모든 이론을 동등하게 기술함으로써 그 이론들은 가치의 평준화를 거쳐 끝내는 무화되기에 이른다.
...
<부바르와 페퀴셰>에는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이란 무용하고, 불변의 진리도 없다는 작가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어느 소설보다 진하게 배어들어 있다.
⌗ 아비 바르부르크
1920년대 사진을 이용해서 미술 아카이브로 접목시킨 미술사학자
바르부르크는 예술작품을 연구대상으로 다룰 때에 작품의 미학적 가치나 양식사에 관심갖지 않았고 인류의 이미지의 사용이라는 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접근하여 자신의 미술사 연구를 문화인류학적인 이론과 접목하고자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예술작품은 하나의 자 족적인 현상으로서의 칸트식의 “무관심적 쾌감”의 대상이 아니며 많은 의도와 요소들이 서로 만나는 그리하여 수많은 의미와 층들이 어 우러져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의 정신사적 위상을 증거하는 인류학적인 기록이다. 즉, 그에게 있어 미술의 역사는 이미지로 가득한 문화 사인 것이다.
⌗ 벤야민은 진정한 수집가란 대상들을 자본으로서 전시하거나 다 써버리기 위해 그것들을 축적하는 것에 이끌리는 소비자에 맞서 “사물들의 유용성을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수집 행위에 결정적인 것은 “그 대상이 가능한 한 그 등가물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기 위해 대상의 모든 기능으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용과는 정반대의 대립물로, 완벽함(completeness) 이라는 신기한 범주 아래 자리잡는다.
construction
purpose
지시와 실행 간 관계 구조가 느슨하여 낙천적인 성취가 불가할수 밖에 없는, 실패가 예견된 퍼포밍의 구현-이벤트의 픽션을 제작해보고자 한다.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처럼 도서관이라는 우주를 삼킬 작정으로 모든 책들을 읽어 소화하겠다는 거친 시도 그리고 그들이 당면한 자연스러운 실 패로부터 시사하는 바를 참조한다. 이에 더불어 도서관을 실험적으로 맵핑하고 해킹하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여 본다. 도서관의 대출 시스템과 서지 운영 시스템을 연구하고, 원활한 통신을 방해하는 네트워크 공격의 프로그램을 간이적으로 구축하여 가동 및 시연한다.
절도 및 해킹을 위한 도서관의 스코어와 설계도 제작을 통해 그간의 (책과 도서관을 재료로 한) 작업 개념들을 통찰하고 엮을 수 있는 시간을 꾀한다.
작업계획에서의 소고
아틀라스 회화 연작에서는 회화라는 매체의 특정적인 부분들을 작업의 트리거로 삼았다. 나열, 집적된 화면들로부터 비롯되는 공간적 스펙타클, 형식과 개념에 부합하도록 구성 한 도상들, 추상 레이어들 간의 소격효과와 같은 이미지 근간 실험을 해보고자 하였다. 우주적 공간으로 은유되는 도서관 서가와 빼곡하게 메워진 책들의 지형을 회화적 시각경험 으로 옮겨보려 한다. ‘중앙자료실을 3개월 안에 미술관으로 이사해야 하는데...’ 라는 의제가 주어진다면, 어떤 미술의 제스처로 움직일 것인지 직관적으로 떠올려보고자 했다.
단채널 영상 Stolen Cabinet에서는 그간 작업에서 다뤄보지 않았던 부분인 서사와 픽션에 접근해보고자 하였다. 서사를 알리바이로 하여 작업의 바탕 개념과 내용을 시나 리오화하고 의사-프로그램화 하고자 한다. 주인공에게는 작업자로서 미술에 갖는 ‘나’의 태도와 관심사가 투사되어 있다. 뒤엉킨 자료들을 규격별로, 책등의 색깔별로, 종목별로 정리하고 모으기를 좋아하는 ‘나’의 개인적인 수행들, 무언가를 헤집고 훔쳐서 더 크게 삼키고픈 (다소 숨기고 싶은) 욕망들을 서사에 투영해본다. 전시장에서 작업의 정면과 B-side 를 동시에 보여주고 싶은데, 이를 구축적인 방식으로 잘 정돈하여 제시할 수 있는 방법과 매체로 영상을 택했다.
미술관에서 보편적으로 영상 작품들이 전시되는 방식을 작업 내부로 끌어 들이려 했다. 전시장에서의 영상은 미술관의 운영 시간과 같은 궤적을 갖는다. 미술관 운영 시간동안 영상들은 반복재생 마라톤을 달리며 시작과 끝이 엉키곤 한다. 관람객은 극장이라는 지지체에서 경험하는 서사 내부의 시간이 아닌, 전시장이라는 현재적, 실제적인 시간에서 영상 에 침투해야 한다. 본 작업에서 모티브로 삼았던 부바르와 페퀴셰가 갖는 수행의 순환구조를 상기하며(시작하는 장면과 끝나는 장면이 같은 사물을 포착하도록 구성) 서사구조와 전시장의 영상 구동방식이 맞물리게끔 제작하고자 한다.
처음으로